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김준용·이상배
호천마을에 빨래방 차린 기자들
무료 빨래 대신 이야기로 ‘세탁비’
산복도로 주민들과 함께한 기록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 선정
87번 버스가 산복도로를 달린다. 산허리에 있는 정류장에 멈춘다. 구불구불 오르막을 따라 도착한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오래된 집이 다닥다닥 붙은 한적한 동네다.
조금 이상한 청년들이 마을의 정적을 깼다.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은 그들은 자연스레 골목길로 들어갔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 특별한 공간으로 향했다. 돈은 받지 않는데 공짜는 아닌 빨래방. 마을 사람들은 빨랫감을 맡겼고, 청년들은 소중한 이야기를 받았다.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산 중턱 호천마을에서 청년들이 빨래방을 운영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직원들은 사실 빨래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젊은 <부산일보> 기자와 PD들. 좌충우돌을 거듭한 그들은 제대로 된 빨래에 성공하며 점차 어르신들 마음을 얻는다. 특유의 넉살과 살가움을 보이며 산복도로에 정착하고 밀착했다. 결국 빨래방은 시끌벅적한 사랑방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주민들은 어느새 자기 삶과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근현대사와 마찬가지인 ‘그들이 사는 세상’은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됐다. 공장에서 나이키 신발을 만든 어르신 등 저마다의 사연은 이번에 출간한 책에 모아 담았다.
산복도로에 빨래방을 열겠다는 생각은 젊은 기자들 관심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판자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고,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 소중한 보금자리가 된 공간이 산복도로 일대다. 산허리 도로와 마을은 굴곡진 부산 지형과 역사가 반영됐고, 부산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풍경이 된 지 오래다. 호천마을도 대표적인 공간이다. 산복도로가 배경인 드라마 ‘쌈, 마이웨이’를 여기서 찍을 정도다.
기자들은 산복도로를 도시재생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많은 시선이 께름칙했다. 현장을 누비다 보니 예산 수백억 원을 투입한 건물이 생겨도 주민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대형 시설을 짓고 낙후된 환경을 바꿔 관광지로 발전시키는 그동안의 공식이 완벽한 해답은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평 남짓한 산복도로 빈집을 빨래방으로 만들기로 했다. 누구나 덮는 이불이나 옷가지를 깨끗이 빨아주는 게 실생활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빨래방을 찾는 부산 역사의 산증인들에게 돈보다 소중한 이야기를 받기로 했다. 수백억 원대 건물보다 더 가치 있는 보석 같은 이야기를 수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산복빨래방은 따뜻하고 애달픈 이야기가 오간 공간이 됐지만, 사랑방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젊은 직원들은 빨래방을 만들 예산을 달라고 회사 설득부터 나서야 했다. 신문사에서 예산 2000만 원을 확보하기 위해 ‘빨래방이 곧 만들어질 겁니다’라고 소문을 냈고, 일부러 다른 기획안은 만들지도 않았다.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기자와 PD가 ‘셀프 인테리어’에 나선 이야기도 책에 담겼다. 직접 타일을 붙이기도 했고, 어르신들 눈에 잘 띄도록 주황색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입간판에 신경을 쓴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산복빨래방은 ‘OPEN’이나 ‘CLOSE’ 같은 영어는 지양했다. 대신 ‘열어요 오전 10시’ ‘닫아요 오후 6시’ ‘쉬어요 주말 / 공휴일’ 같이 한글로 정보를 표시했다. 영어를 모르는 어르신들을 배려한 셈이다. 이 입간판은 SNS에서 화제가 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주민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도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빨래방 홍보를 위해 마을 에어로빅 활동에 매주 참여하는 노력은 기본이었다. 민원 해결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 어르신이 1955년 남동생과 찍은 빛바랜 사진을 들고 왔고, PD들이 크기를 키우고 보정에 나서기도 했다. 산복빨래방 주변에서 카페 ‘노란호랭이’를 운영하는 30대 여성 사장님을 보며 손님 응대법도 배웠다.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회사 사진기자를 초청해 빨래방을 일일 사진관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드렸다. 롯데그룹 지원으로 단체 영화관 나들이를 성사한 이야기도 책에 담겼다.
책은 이달 14~18일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에도 선정됐다. 현장에서 준비한 분량은 완판됐다. 책을 낸 출판사가 경남 통영시에 있는 ‘남해의봄날’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올해 경남 남해군 ‘해변의 카카카’ 등과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지역 출판사 저력을 보여줬다.
책에는 지역 언론인이 가진 고민과 포부도 담았다. 기자들은 신문을 잘 읽지 않는 시대에 가장 ‘부산스럽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산복빨래방 프로젝트가 한국기자상, 한국신문상 등 언론상 6관왕을 차지한 만큼 이 책으로 저널리즘과 지역 언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책에 표시된 QR코드는 해당 내용과 관련한 산복빨래방 유튜브 영상으로 연결된다. 김준용·이상배 지음/남해의봄날/256쪽/1만 6000원.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기사원문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3062917252264297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김준용·이상배
호천마을에 빨래방 차린 기자들
무료 빨래 대신 이야기로 ‘세탁비’
산복도로 주민들과 함께한 기록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 선정
87번 버스가 산복도로를 달린다. 산허리에 있는 정류장에 멈춘다. 구불구불 오르막을 따라 도착한 부산 부산진구 범천동 호천마을. 오래된 집이 다닥다닥 붙은 한적한 동네다.
조금 이상한 청년들이 마을의 정적을 깼다. 아침마다 출근 도장을 찍은 그들은 자연스레 골목길로 들어갔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 특별한 공간으로 향했다. 돈은 받지 않는데 공짜는 아닌 빨래방. 마을 사람들은 빨랫감을 맡겼고, 청년들은 소중한 이야기를 받았다.
<세탁비는 이야기로 받습니다, 산복빨래방>은 부산 산 중턱 호천마을에서 청년들이 빨래방을 운영한 이야기를 엮은 책이다. 직원들은 사실 빨래도 제대로 할 줄 몰랐던 젊은 <부산일보> 기자와 PD들. 좌충우돌을 거듭한 그들은 제대로 된 빨래에 성공하며 점차 어르신들 마음을 얻는다. 특유의 넉살과 살가움을 보이며 산복도로에 정착하고 밀착했다. 결국 빨래방은 시끌벅적한 사랑방이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주민들은 어느새 자기 삶과 인생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근현대사와 마찬가지인 ‘그들이 사는 세상’은 기사와 영상으로 기록됐다. 공장에서 나이키 신발을 만든 어르신 등 저마다의 사연은 이번에 출간한 책에 모아 담았다.
산복도로에 빨래방을 열겠다는 생각은 젊은 기자들 관심에서 시작됐다. 한국전쟁 때 피란민들이 판자촌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고, 산업화 시대에 노동자들 소중한 보금자리가 된 공간이 산복도로 일대다. 산허리 도로와 마을은 굴곡진 부산 지형과 역사가 반영됐고, 부산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풍경이 된 지 오래다. 호천마을도 대표적인 공간이다. 산복도로가 배경인 드라마 ‘쌈, 마이웨이’를 여기서 찍을 정도다.
기자들은 산복도로를 도시재생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많은 시선이 께름칙했다. 현장을 누비다 보니 예산 수백억 원을 투입한 건물이 생겨도 주민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의문이었다. 대형 시설을 짓고 낙후된 환경을 바꿔 관광지로 발전시키는 그동안의 공식이 완벽한 해답은 아닐 수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3평 남짓한 산복도로 빈집을 빨래방으로 만들기로 했다. 누구나 덮는 이불이나 옷가지를 깨끗이 빨아주는 게 실생활에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신 빨래방을 찾는 부산 역사의 산증인들에게 돈보다 소중한 이야기를 받기로 했다. 수백억 원대 건물보다 더 가치 있는 보석 같은 이야기를 수집할 수 있다고 생각한 셈이다.
산복빨래방은 따뜻하고 애달픈 이야기가 오간 공간이 됐지만, 사랑방으로 자리 잡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젊은 직원들은 빨래방을 만들 예산을 달라고 회사 설득부터 나서야 했다. 신문사에서 예산 2000만 원을 확보하기 위해 ‘빨래방이 곧 만들어질 겁니다’라고 소문을 냈고, 일부러 다른 기획안은 만들지도 않았다.
그래도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기자와 PD가 ‘셀프 인테리어’에 나선 이야기도 책에 담겼다. 직접 타일을 붙이기도 했고, 어르신들 눈에 잘 띄도록 주황색을 많이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입간판에 신경을 쓴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산복빨래방은 ‘OPEN’이나 ‘CLOSE’ 같은 영어는 지양했다. 대신 ‘열어요 오전 10시’ ‘닫아요 오후 6시’ ‘쉬어요 주말 / 공휴일’ 같이 한글로 정보를 표시했다. 영어를 모르는 어르신들을 배려한 셈이다. 이 입간판은 SNS에서 화제가 되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주민들과 친해지기 위한 노력도 책에 고스란히 담겼다. 빨래방 홍보를 위해 마을 에어로빅 활동에 매주 참여하는 노력은 기본이었다. 민원 해결에도 최선을 다했다. 한 어르신이 1955년 남동생과 찍은 빛바랜 사진을 들고 왔고, PD들이 크기를 키우고 보정에 나서기도 했다. 산복빨래방 주변에서 카페 ‘노란호랭이’를 운영하는 30대 여성 사장님을 보며 손님 응대법도 배웠다.
특별한 추억을 선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회사 사진기자를 초청해 빨래방을 일일 사진관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렇게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드렸다. 롯데그룹 지원으로 단체 영화관 나들이를 성사한 이야기도 책에 담겼다.
책은 이달 14~18일 열린 서울국제도서전 ‘여름, 첫 책’에도 선정됐다. 현장에서 준비한 분량은 완판됐다. 책을 낸 출판사가 경남 통영시에 있는 ‘남해의봄날’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올해 경남 남해군 ‘해변의 카카카’ 등과 함께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지역 출판사 저력을 보여줬다.
책에는 지역 언론인이 가진 고민과 포부도 담았다. 기자들은 신문을 잘 읽지 않는 시대에 가장 ‘부산스럽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시도했다고 고백했다. 산복빨래방 프로젝트가 한국기자상, 한국신문상 등 언론상 6관왕을 차지한 만큼 이 책으로 저널리즘과 지역 언론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책에 표시된 QR코드는 해당 내용과 관련한 산복빨래방 유튜브 영상으로 연결된다. 김준용·이상배 지음/남해의봄날/256쪽/1만 6000원.
이우영 기자 verdad@busan.com
기사원문 https://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23062917252264297